2. 한인이민의 상황과 비전

2. 한인이민의 상황과 비전 관리자 01.15.09 3082
II. 이민 목회의 대한 소고 (A thought on the immigrant ministry)

1. 서론 (Introduction)이 시대의 복음사역의 가장 큰 혼돈은 복음은 무엇을 위하여 주어졌는가 하는 데에 있다. 복음은 교회부흥이나 우리 자신의 주장을 추인시키기 위한 신학 노름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주어졌다. 이 복음으로 말미암은 변화는 인류역사가 진행시켜온 변화, 즉 기본 철학은 그대로 두고 기술과 이를 뒷받침하는 이념만을 바꾸어 온 변화가 아니라. 이 변화는 삶의 근본을 인간 자신에게서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께로 옮겨 버리는 새 세계의 열림과 새 생명의 시작이다. 이미 있었던 앞의 것의 개발과 발전이 아니라 옛 것의 버림과 하나님의 안에 새 것을 향한 헌신이다. 이 새 것은 우리가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그 표적을 본 것이다. 따라서 믿음의 요구는 절대 조건이 되는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 안에 나타난 새 생명과 새 세계를 체험하고 그것이 약속된 하나님의 일이 성취돈 것임을 고백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여기서 교회는 하나님만을 삶의 근본으로 삼은 새 공동체를 말하는 것이지 조직이나 종교단체를 말함이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다.목회는 기본적으로 두 개의 작업의 현장이다. 첫째는 개개인의 삶의 근본을 자신으로부터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인도자이신 하나님께로 옮기게 하는 것이며, 둘째는 그러한 사람들의 공동체를 이룸으로 하나님을 근본으로 고백한 사람들이 창조적 삶의 장을 마련하며 그 길을 인도하는 데에 있다. 목회의 평가는 오직 이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따라서 교회사적 평가는 그 시대에 교인의 수가 얼마나 되는가 보다는 얼마큼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삶으로 증거하였으며 그 영향력으로 그 시대를 변화 시켰는가에 두어야 한다.이 일반적 복음사역의 테두리 안에서 속한 사회와 시대에 따라 목회는 구체적 비전으로 정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속한 한인이민 공동체에 주어진 상황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미국 속에 소수민족으로 살아야 하는 이민의 상황이다. 이 이민의 상황 안에서 삶의 근본을 하나님께 두며 창조적 삶의 공동체를 어떻게 이루는 가에 대한 적용되어질 수 있는 대안이 바로 이민 목회의 비전이라 하겠다. 여기서 단 한 특정그룹의 구체적 비전은 그 그룹의 특정성(particularity)으로만 끝난다고 하면 그것은 바른 비전이 될 수 없다. 우리는 특정 개인으로 태어나고 살고 죽지만 인류라는 보편적 테두리 안에서 살고 있다. 나의 특정성은 따라서 인류 전체의 보편성(universality)에 기여되고 한 지체로써 전체의 몸에 유기적(organically)으로 연결되어져야 한다.즉 비전은 누구의 것이든지 생명성이 있어야 하며, 여기서 생명성은 유기적 일체성 즉 배타성, 대립성, 분열성적이 아닌 것을 말한다. 그러나 무조건적 동화성(assimilation)을 말하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마치 암세포나 AIDS바이러스가 몸의 한 지체나 부분이 결코 되어서는 아니 되듯이 말이다. 예를 들면, 히틀러의 비전은 독일민족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일어난 그들의 특정비전이었지만 인류의 보편성에 역행한 것으로 결코 건강한 비전이 될 수 없었다.

2. 한인 이민의 비인격적 상황 (Dehumanizing context of Korean-American)

인류의 역사는 다수(majority)와 소수(minority)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진행되어 왔다. 인간의 삶의 장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헤게모니를 잡은 자/그룹과 잡지 못한 자/그룹의 갈등이 늘 따랐다. 이 갈등과 대립 속에서 힘을 잃은 소수는 다수에 의해 점령되든지 다수 속에 동화(assimilation)되어 스스로 자신을 잃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되었다. 결국 일반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에 소수그룹이나 소수민족에게 주어진 선택이란 그 자신을 잃거나 포기해야 하는 비참한 선택 밖에는 주어지지 아니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러한 상황(context), 즉 자신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우리는 비인격적(dehumanized) 상황이라 부른다. 성경의 하나님은 종류대로 창조 하시고 좋아하셨다. 결코 류(Kind)의 특성이 힘 있는 자/그룹에 의하여 말살되어지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비인격화된 개인이나 그룹을 인격화(humanize)시킴으로 개체의 존재 목적과 의미와 비전을 살리시는 존재의 근원 (ground being)이시다. 이제 한인이민의 비인격적 상황(dehumanizing context)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A. 자의식의 문제 (self-identity)
사회학자 쿨레이(Charles H. Cooley)에 의하면 인간의 자의식은 타인들(significant others)에게 반영된 자신의 모습을 통하여 정립된다고 looking glass-self’의 개념 속에서 설명하고 있다. 즉 타인에게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 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인 이민자들의 문제는 그들의 자의식을 정립할 수 있는 공통성을 가진 거울이 없다는 데에 있다. 크게는 고국의 친구(mother-land community)들과 이민 사회의 이웃들(immigrant’s ethic community)과 미국사회의 구성원들(host community)의 이민자에 대한 반향이 다르며 그 그룹 안에서도 구체적 구성원들의 반향은 또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같은 이민자들 안에서도 그 반향은 또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같은 이민자들 안에서도 그 반향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재미 한인 사회학자 허원무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이민사회 내의 관계성(intragroup-relation)에서만도 이민 년 수에 따라 접촉-상호 돕기-경쟁-갈등-수용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이러한 단계를 거치면서 이민자들은 상호 강에Fellowcountrymen in a strange land – Fellowcountrymen but – Fellowcountrymen so what – Fellowcountrymen rediscovered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1979년 2월 28일자 LA 한국일보는 LA 라이온스 클럽 주최 웅변대회에서 박선영이라는 여학생의 우승 소식을 싣고 있다. 그 웅변 주제는 나는 누구인가?였으며 그 웅변의 주 요절은 나는 이땅(미국)에서 이방인입니다. 그렇다고 한국으로 돌아 갈 수도 없습니다. 그 곳에서도 나는 역시 이방인일 테니까요. 과연 나는 누구입니까? 언젠가는 나의 이 질문에 답을 알기를 원합니다. 이었다. 한인 이민자의 자의식의 혼돈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B. 주류사회의 억압 (suppression of the dominants)
주변인간의 정의를, 사회학자인 스톤퀴스트 박사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주변인간이란 대개 주류그룹으로부터 소외된 자를 말한다. 그는 주류그룹에 진입하고 용납되어지기를 추구하나 받아들여지지 아니하고 주류그룹의 둘레에 위치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주류그룹의 가치관과 이상을 다 받아들였으나 주류그룹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못한 외방인들(outsiders)이다.  미국사회의 주류에 진출하고 당당한 일원이 되는 것은 모든 미국 이민자들의 당연한 꿈일 것이다. 그러나 미국 주류사회 속에 깊숙이 자리한 인종차별주의는 한인 이민자들이 미국화되면 될수록 더 심각하게 느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 신문을 보고 한국식당에 가고 한인친구들과 어울리는 1세 이민자들은 미국 주류사회의 차별을 비교적 덜 느끼며 살 수 있다. 그러나 주류사회 깊숙이 들어 갈 수밖에 없는 2세들은 이 차별을 더욱 심각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아래에 인용한 스톤퀴스트 박사의 말을 들어보자. 주변인간에 대한 한 법칙은 주변인간이 자신을 주류사회와 더욱 근접시킬수록, 자신이 주류사회의 일원이 아니라는 차별을 더욱 심각하게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3. 한인이민의 비전(The hope for Korean-American)

자신의 문화와 모국으로부터 뿌리가 뽑혀졌고(uprooting), 이민 온 사회의 주류 속에 들어갈 수 없는 (rejecting) 한인 이민자들에게 그러면 과연 소망이 있는 것인가? 그 대답은 예이다. 변화는 뽑고 파괴하고 파멸한 후에야 건설하며 심으므로 오는 것이기에(렘 1:10) 이 한인이민자의 상황은 새 창조의 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주류사회에 속하여 기득권 유지(maintaining status quo)에 급급하여 현 체제와 상황에 집착되어 있는 자들은 변화를 가져 올 수 없다. 한인이민자들의 뽑히고 거절당한 삶의 자리는 바로 하나님의 창조적 변화를 일으키는 삶의 자리가 되는 것이다. 새 창조는 변화의 혼돈을 통해서만 오는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이 광야의 혼돈을 통해서 새 백성으로 창조 되었듯 말이다.  그래서 구약학자 브루그맨은 선지공동체와 주변공동체의 닮음을 주장한다.

주변공동체가 주류사회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지배논리의 허구성을 직시하고 규탄하듯이 선지공동체로 궁중제사장적 권력 옹호논리(royal rationality)를 규탄한다. 이러한 주변성은 크게 아래 두 가지를 제공한다.

     A. 해석학적 우위성 (hermeneutical privilege)
여류신학자 솔레(Dorothee Soelle)는 애급에서의 히브리 백성의 가장 큰 적은 애급인이 아니라 그들이 애급식의 생활과 사고방식에 젖어 있었다는 데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 사고방식이 광야생활 동안에 그들에게 가장 큰 방해물이었던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읽을 수 있다. 미국 주류사회의 가치관은 한마디로 소비주의(hedonistic fascism/consumismo)에서 오고 있다고 솔레는 주장한다. 즉 삶의 기본적 의미가 제공된 상품의 소비를 통하여 온다는 것이다. 이것을 마르꾸제(Herbert Marcuz)는 사회가 제공한 것(given)외에 그것을 초월하여 가능함(possible)을 보지 못하는 평면적 인간(one-dimensional man)이라고 정의한다. 복음은 이러한 세상의 뒤틀려진 허상을 깨고 삶의 진실을 증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브루그만은 주변성적 상황(broken enculturation)이 조금도 없는 곳에는 복음의 선포가 불가능하다고까지 주장한다. 교육학자, 닥스츠라(Craig Dykstra)는 복음은 주변성적 상황에서 비로소 뉴스가 된다고 외친다. 결론적으로 주변성적 상황에서만 기득권 유지를 위하여 왜곡시켜 놓은 지배논리(royal rationality)의 허구성을 직시하며 진실 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B. 창조적 가능성 (creative potentiality)
주변인간은 주류사회의 허구성을 보게 되면서 그렇다면 과연 진실(true reality)은 무엇인가?라고 묻게 된다. 이 질문은 갈등을 일으키고, 갈등이 바른 인도함을 받을 때에 파괴하며 건설하는 창조적 동력으로 나타나게 된다. 사회학자 파크(Robert E. Park)는 주변인간은 이 갈등 속에서 주류사회인 보다 더 넓은 사고의 비평과 더 예리한 지성과 보다 더 객관성 있는 관점을 가지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주변인간은 항상 주류사회인보다 상대적으로 더 깨어있다라고 주장한다.

이 주변인간이 가지고 있는 장점들이 바로 현재 소속되어 있는 사회의 허구성을 깨뜨리고 새 가능성을 건설하는 동력이 되는 것을 역사학자 토인비(Anold Toynbee)는 그의 저서역사의 연구에서 역시 주장하고 있다.

4. 창조적 소수의 역사적 표본 (Historical model for marginals)

인류역사가 주류와 주변 또는 다수(majority)와 소수(minority)의 대립으로 계속되고, 그 소수는 언제나 동화나 자멸의 길을 걸어왔음을 위에서 적었다. 그런데 소수로써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역사를 정복하고 역사의 창조적 주역이 된 소수가 있다. 그들이 바로 유대인들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이다. 이 두 그룹의 특징은 첫째로 그들이 모두 혹독한 핍박의 대상이었다는 것과, 둘째로 자신들의 자의식과 비전은 근거를 세상에 두지 않고 하나님께 두었다는 것이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fiddler on the roof)이란 작품이 보여주듯이 모진 핍박의 세월 속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자의식과 비전의 포기를 거부한 유대인은 타민족의 추종을 불허하는 성공적 삶을 성취했다. 세계 노벨상의 삼분의 일이 유대인에게 수상이 되었고, 미국의 각종 문화상, 아카데미, 퓨리쳐, 애미, 토니, 그래미 등의 절반 이상이 매년 유대인에게 수여되고 있다. 사회학적 조사에 의하면 유대인이 5%가 있는 지역에는 반드시 그 지역의 지도자의30% 이상이 유대인이라는 보고가 나왔다. 미국의 소수 이민민족 중에 가장 성공적이며 유대인이 이주해 들어가는 지역은 어디나 학군이 좋아지고, 거주환경이 좋아지며, 범죄율이 현저히 저하된다. 유대인의 경제, 정치, 문화 방면의 영향력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또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인의 영향력 정도를 넘어 서서 300년 만에 로마를 정복해 버리고 말았으며, 소위 말하는 서구화(westernization)의 근간이 되어 오늘 전 세계가 서구화된 오늘날 문화 (western civilization)의 모체적 영향력이 되었다.

이 두 그룹의 성공의 비결은 자신들의 자의시과 비전을 세상적으로만 파악하면 보이지 않는 벽과 천정이라는 소수그룹의 제한성을 벗어날 수 없지만, 자신들의 자의식과 비전을 하나님 안에서 파악함으로 말미암아 부조리한 현실의 벽을 초월하여 새로운 대한 (radical alternative)을 제시할 수 있었다는 데에 있다. 복음이 교회 부흥이나 기독교적 체제 유지를 위해 선포된다면 그 복음은 복음으로써의 능력도 의미도 잃어버린 것이다. 복음은 세상을 초월하는 자의시과 비전을 창조하여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자와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눈먼 자를 보게 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개인과 사회를 변혁시킬 때 복음은 복음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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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이민의 상황과 비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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