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킬레스와 프리아모스
인간의 생명에서 결코 제하여 버릴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자본주의가 곱빼기의 만 배가
되어도 인간에게서 사랑의 이타성 즉 다른 존재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 아픔에 어떤 위로가 될
때에 존재의 가치를 느끼는 것은 없앨 수가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기성은 일시적이지만
이타성은 영원하다. 아이 때에는 이기성만 드러내다가도 성숙할수록 이타성이 깊어지는
것도 인간의 피할 수 없는 특성이다.
이러한 인간이 현상의 화려함(spectacle)에 눈이 멀면 진정한 본성에 어긋나게 자기중심적
고집을 세우고 스스로 파괴적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의 소박함은 생명의
뿌리이다. 소박함을 잃을수록 인간은 허상의 스펙타클에 사로잡히게 된다. 허상에
사로잡히면 단절이 일어난다. 도시가 시골보다 단절이 심한 것은 그런 탓이다. 우리 세대의
단절이 우리 부모 세대보다 심한 것은 다 같은 맥락이다. 스펙타클이 관심이 되면 사람은
자신의 소박함을 천박함으로 오해하고 가리고 숨기려한다. 밭에 거름을 주려 똥지게를 지고
가는 것이 부끄럽게 보이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이것을 잘 보여준다. 부자는 나사로의 극심한 고통에
전혀 무관심하고 단절된 모습을 보여준다. 어쩌면 나사로를 보았을 때 저런 자는 없어져야
한다고, 자신의 세계와 그림에 관계 없거나 오히려 방해물로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존재 자체도 잊었을 것이다. 그것이 지옥이다. 우리는 천국과 지옥도 상황으로 이해한다.
천국과 지옥은 상황이 아니다. 본질이다. 모든 것이 사랑으로 교통될 때에 홀로의 단절을
상상해 보라. 그것이 지옥이다. 지옥인 이유는 신성(神性)의 완전한 소멸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의 모든 아름다움, 신비, 가치, 초월성의 소멸이다. 이 하나님 형상의 초월성은
연대성(connectedness) 또는 공감(empathy)에서 피어난다. 민족의 아픔에 공감할 때에
간디, 김구 선생이 피어난다. 타고르의 시가 피어나고, T.S. 엘리엇의 시가 피어난다 (다른
의미의 아픔과 절망이지만). 공감을 못하면 자기만의 스펙타클을 찾아 이완용 등 을사오적이
일어난다.
공감의 극치가 주님의 기도이다. 우리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면 모두 우리가 된다. 우리
서로 일용할 양식을 나눈다. 스카이라운지의 몇 백불짜리 스펙타클 디너보다 건강식이고
영양식이다. 무엇보다 행복식이다. 우리의 죄를 서로 사한다. 부족과 죄악을 감출 필요가
없고 서로의 부족과 죄악 때문에 초월이 피어난다. 우리 서로 시험에 들게 하지 않는다.
상 대 의 아 픔 에 아 주 섬 세 히 민 감 하 다 . 사 랑 의 민 감 성 이 다 . 상 대 를 배
려함으로 내 생명은 더욱 깊어지고 그 열매는 만민이 누린다. 이때에 우리는 신의 성품(벧후
1:4)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문학이나 철학에 관심이 조금 있는 사람이라면 서양의 정신(정복이 아니고 평등과
자 유 )의 뿌 리 로 호 메 로 스 (Homer)의 오 디 세 이 (Odyssey)와 일 리 아 드 (Iliad) 그 리 고
아이네이아스(Aeneas)의 세 이야기를 꼽는다. 이 세 작품은 신들이 결정한 운명에
순복치 않고 자신 안의 신성을 펼친 영웅담들이다. 서양은 뿌리로부터 인간과 신을
구분하기를 힘들어 한다. 인간사에 신들이 얽히고, 신들의 이야기에 인간이 얽혀 인간 속의
신성을 표현해 왔다. 이 서양의 특징이 가장 소롯이 빛 되어 어둠 속에 나타나는 장면이
일리아드(트로이 전쟁이야기) 24장이다.
트로이의 자랑스러운 왕자 헥토르가 아킬레스(그리스의 영웅)에게 죽음을 당한다.
아킬레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전차 뒤에 매달고 그리스의 진영으로 돌아간다. 사건은 밤에
잃어난다. 어둠 속에서 인간의 신성은 비로소 밝혀지는 것이다, 스펙타클 때 즉 아킬레스가
이길 때가 아니다. 그 밤에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트로이왕 프리아모스가 아킬레스의
천막에 들어왔다. 왕이 적진에 목숨을 걸고 들어와 적장의 숙소에 들어온 것이다. 깜짝 놀란
아킬레스에게 그는 말한다.나에게 마지막 남은 아들이 헥토르였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다. 그런데 네가 죽여버렸다. 오∼나는 불행하다. 고향 땅에 있는 너의 아버지도 네가
살아있다는 소식 때문에 기뻐할 거다. 내게는 이제 그런 아들이 없다. 시신이라도 내게
돌려다오. 내 손으로 그를 장례케 해다오.그 말을 들은 아킬레스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킬레스도 자기 아버지가 생각이 났고, 만약 자기가 죽었다면 프리아모스 왕과 똑같이 했을
자기 아버지를 본 것이다. 여기에서 일리아드의 절정이 나타난다. 일리아드는 아킬레스와
프리아모스가 서로를 보며 신처럼 여겼다고 적고 있다.
이것이 연민 즉 compassion이다. 연민보다는 compassion이 뜻이 더 분명하다. com은 함께
라는 뜻이고 passion은 고통, 고난의 뜻이다. 즉, compassion은 고통을 함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신성이다. 여기에서 이미 우리는 십자가의 하나님을 만난다. 일리아드(또
오디세이, 아이네이아스도)는 전쟁의 승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삶의 승자를 이야기하고
있다. 삶의 승자는 만인, 만물과 하나된 사람이다. 그리고 그 하나됨은 고통의 공감으로만
이루어진다. 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실 때에, 그 안에는 나의 고통(원한)에만 사로
잡혀있지 말고 적의 고통(원한)도 느끼라는 것이다. 원수란 나의 스펙타클(아무도 나를
미워하거나, 내 길을 막거나, 나를 정죄해서는 안돼)이 만든 허상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스펙타클을 벗고 서로가 함께 고통 중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같이 느낄 때에 우리의 신성은
피어나고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된다. 주님의 기도가 이루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