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더불어 살아가기 life together
성경의 중심은 더불어 살아가기(life together)입니다. 형제(자매)가 하나 되어 함께 살아감은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가 중심입니다.
역사의 근본문제는 함께 살아가기를 모르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되어 함께 살아간다면 그곳에는 가난한 자가 없으며(신 15:4-5) 핍절한 자도 없을 것입니다(행 4:32-35).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의 총 결론은 ‘서로 사랑하라’(요 13:24)이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입니다(요 13:35).
즉 “믿는다 = 사랑한다(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입니다.
2. 연약하기 powerlessness
성경의 중심이 더불어 살아가기 이므로 성경은 우리 개개인을 능력 특출한 사람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연약하기에 오히려 ‘당신은 내게 하나님의 축복입니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더라 (창 2:25)입니다.
성경적 신앙은 나는 피조물이기에 한없는 연약함과 부족함 뿐이기에 하나님을 한없이 의뢰하는(양이 목자를 의뢰하듯 : 시편 23편) 삶입니다.
연약한 모습 그대로 자신을 나누고(감추지 않고: 나뭇잎치마) 상대도 부족한 모습 그대로 용납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 연약하기를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superman으로 이해하는 이해야 말로 예수님께서 심각하게 경고한 유대-바리새적 메시아관에 빠지는 것이요,
세속적 종교화로 빠지는 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생명 다해 보여주신 작지만 진실하게 그냥-함께 살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의 사랑은 추상적 사랑이 아니라 연약한 우리가 판단과 정죄 없이 서로를 용서, 용납하며 격려하는 삶의 복된 생명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3. 어린양의 길 the way of little lamb
더불어 살아가기의 가장 본이 되는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이며, 이 길이 진정으로 승리하는 길입니다(계 5:5, 12). 세상은 이 길을 알지 못하여 “이기고 또 이기려”(계 6:2)하여 삶 전체가 환난이 됩니다.
믿음의 길은 전혀 이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의 유업자이며,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누리기에 더 이상 무엇을 더 획득해야(이김으로)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을 나누고 ‘너’를 복되게 세워주는 복의 근원이요 축복의 통로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저절로 어린양의 길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4. 연약한 사람들 the weaks
우리들(온 세계) 가운데 연약한 사람들은 우리들에게 축복으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연약한 사람들을 짐이나 도와주거나 처리해야 될 대상(object)으로 봅니다. 그것은 자신들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견장들을 붙이면 우리가 부요해진 줄 압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니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연약한 사람들(육체, 정신, 경제, 정치 또 영적으로)은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어떤 마음을 회복해야 할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을 가진 것 같지만 사실은 텅 빈 나의 모습을 일깨우며 생명 만으로의 자족을 나누어주고 있습니다.
무엇을 이룬 것 같지만 사실은 허상 뿐 인 내게 진정한 이룸은 나 자신이 되는 것뿐임을 격려해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아는 발달장애를 가진 한 자매님과 얘기를 나누다보면 그 분이 가진 순수함(자신일 뿐 어떤 가식도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빛의 마음)을 제가 묵상 안에서 누리려면 제게는 적어도 한 두 시간의 몸부림 끝에야 그 평안과 희락에 겨우 들어가곤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가운데 연약한 자로 계셨으며 자신의 연약함을 용납하지 못해 자신을 부풀리려 온갖 거짓과 수단을 쓰는 우리를 구속(redeem)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기적은 그 분의 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연약함)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지 내 능력이 너를 구원했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5. 두 가지의 회복 two recoveries
첫째, 성경적 교회상(not 종교단체 but 삶의 공동체)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사도행전 2-4장이 보여주는 성도들의 더불어 사는 삶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형태(form)의 문제 보다는 같은 영으로 같은 지체된 본질(nature)의 문제입니다. 성령충만까지도 power(힘)으로 이해하는 이 시대에 성령님은 어떤 개개인을 초인으로 만드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 되어 더불어 함께 살게 하시는 분이심이 선포되고 누려져야 합니다.
둘째로 복음의 회복입니다. 복음의 중심은 희년의 선포입니다(눅 4:19). 다시 말하면 더불어 살기의 회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더불어 살기를 위한 것입니다(엡 2:11-22). 이 시대는 목적인 더불어 살기가 빠진 십자가가 선포되어 복음은 교리로 전락되고, 신앙은 개인적 영성고취가 되고, 예수님은 기독교라는 종교 창시자가 되시고, 교회는 종교단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만물이 하나님 안에서 화목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뿌리는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이제 십자가의 교리에서 십자가의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더불어 살기라는 성경주제가 사라짐으로 교회 안에서 조차도 나는 너보다 잘 믿고 잘나고 잘 되어야 하는 비성경적 신앙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더불어살기가 깨어져 환난과 고통이 그치지 않는 이 땅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먼저 우리와 더불어살기를 시작하셨으며, 그의 십자가의 화목으로 우리 가운데로 더불어살기가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더불어살기 안에서만 우리는 나의 나 됨(I am who I am)을 누릴 수 있으며 또 너의 너 됨(who you are)을 정죄 없이 받아주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 하나임교회는 이 더불어살기를 꿈꾸며 기도합니다. 이 시대의 더불어살기는 형태를 만드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 본질에 있습니다. 그 본질은 나의 나 됨을 누리며 너의 너 됨의 존중입니다. 그 때에 성령님 안에서 우리는 우리 됨(더불어살기)의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참고: 소 주제 제목을 클릭하시면 내용을 보실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