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성기도 : 기도를 하려면
통성기도는 영적으로는 아주 유용하고 귀한 것인데 70-80년대 부흥사들이 분위기 조장(?
)용으로 쓰면서 그 가치가 전락되어버렸다. 영적으로 귀한 것에는 전부 이러한 마귀의
궤계가 붙어 있다. 공동체는 귀할 뿐 아니라 성경적 신앙의 본질인데, 박태선의 전도관,
문선명의 통일교가 다 망쳐놓았다. 인간이(그것이 누구이든지) 만든 것은 인간의 조직일
뿐이다. 힘으로도, 능으로도 아니고 오직 성령으로만 될 뿐이다.
은사는 보석보다 찬란한 것인데, 오순절 계통과 70-80년대 기도원들이 인위적으로
조작하면서 천박 중의 천박으로 전락되었다. 이제는 진정으로 은사를 사모함이 무엇인지
조차도 모르는 형편이다. 은사는 극히 소중한 생명의 광채이다. 은사의 주인되시는
성령님도 고귀하시고 섬세하시며 받는 심령도 아름다울 때에 은사는 생명의 광채가
되는데, 억지로 성령님을 졸라서 빼앗아내고 심지어 가짜도 판치는 덕분에 은사의
아름다움은 감추어져 버렸다.
뿐만 아니라 전도는 다락방이 버려놓았고, 회개는 4단계가 망치고, 신앙의 확신은
구원파가 어이없게 만들어 버렸다. 신앙의 최고봉인 종말적 신앙은 다미선교회가
농담으로 만들고, 영적세계는 김기동파가 장난으로 만들어 버렸다. 근본적 이유는
교회가 영적 실제를 살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에는 이단사설이 붙은 여지가 없다. 그러나
논리에는 얼마든지 다른 논리가 붙을 수 있다. 영적 실제를 상실한 기독교는 끊임없이
이단에 시달리고 있다. 요즈음에는 신천지에도 시달린다고 한다. 내용은 모르지만
이름만으로도 이단의 것임을 알 수 있을 정도인데 시달린다는 것은 기독교 안의 영적
실제가 얼마나 희미한지를 말해준다.
그래도 아직까지 건강한 삼위일체론, 구원론, 기독론, 성령론, 교회론, 종말론, 성경론은
기독교 안에만 있다. 기독교를 하나님은 계시의 모체로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전통에
이어 사용하셨고, 지금도 사용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계시의 모체를 바꾸신다고 하신
적이 없는데, 그 누구가 나와서 이제는 자신이 계시의 모체라 하면(굉장히 무지한 자들은
심 지 어 자 신 이 계 시 라 하 기 도 한 다 ) 그 자 체 가 어 리 석 고
무식한 것이다. 물론 기독교는 완전치 않다. 인간집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중심에
신앙고백과 성경을 완전무오한(교리적 의미가 아니라 영적계시로써) 계시로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 이 후의 사도와 교회의 전통 위에 서 있기에 중심은 100% 진실이며, 그
진실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 세우신 성령님의 역사이다. 얘기가
좀 멀리 나갔지만 대중기독교시대에 현상적 혼돈이 많다보니 본질에까지 흔들리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기에 안타까워서 나누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기독교는 흔들릴 것이지만 그렇게 끝나지는 않는다. 기독교라는 그릇에서 종말의 승리는
반드시 나오게 되어 있고, 그 때문에 기독교 안에서 본질을 회복하려는 기도와 땀들이
흘려지고 있고, 나도 그 중의 하나이다.
다시 통성기도로 돌아가자. 통성기도는 기도를 여는 기도로써 통성기도의 훈련없이는
기도가 열리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도를 하려면 두 가지를 극복해야 한다.
첫째는 생각을 넘어서야 된다. 자기생각 속에 붙들려 있는 사람은 결코 임재(천상의 교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빌 수는 있지만, 예수 이름으로 은혜의 보좌에 나아갈 수는
없다. 둘째는 사로잡힘에서 자유해야 한다. 사람에 따라 깊은 수치, 두려움, 분노와 그에
따른 상처, 원한, 불신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것을 떠나자신이 되어보지 못했다. 무의식
레벨에서 항상 그것이 존재의 뿌리에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침묵이 어렵고 묵상이
깊어지지를 않는다. 이 두 가지, 생각 넘어서기와 사로잡힘에서 자유의 특효처방이
통성기도이다. 통성기도는 생각을 거의 즉각적으로 제압한다. 하나님께 나아가려
부르짖는 부르짖음이 다른 생각들을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임재까지는
시간과 훈련이 필요하지만 생각이 제압되는 것 자체가 굉장한 성숙과 진보이다.
두 번째 사로잡힘에서의 자유는 조금 더 어렵지만, 내 경험으로 통성기도는 확실한
지름길이다. 목이 터지고, 목소리를 잃고 할 정도로 애탐의 부르짖음이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 같은 심령의 깊은 심층을 드디어 연다. 그리고 임재에 나아감에 자유를 얻게
한다. 기독교 안에는 이무기들이 많다. 한 번도 생각과 사로잡힘을 넘어서 기도해 보지
못하고 생각으로만 비는 전혀 능력 없는 이무기들이 많다. 스스로 다른 길을 알고
나아가고 있지 않다면 성도들이 함께하는 합심통성기도로 나아오라. 그리고 심령을
쏟아 부어 보라. 그리고 임재에 들어가 아버지를 만나라. 그 전에 생각의 말들로 신앙을
얘기하지 말라. 스스로 어리석을 뿐 아니라 복을 막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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