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성(I am)을 회복하는 예배
목회 1기가 끝나가는 2011년 저는 초조했습니다. 허상을 보고 달려온 것 아닌가, 저를
신뢰해 주신 성도님들을 바로 인도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등의 생각이 나를
괴롭혔습니다. 목회 2기에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야 하는 데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두려움도 왔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뜻을 잘못 깨달은 것은 아닌지, 내가
하나님께 합당치 못한 것은 아닌지, 제 자신을 재점검하고 사소한 생각까지 회개하고 또
하며 금식과 작정기도로 주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절실하고 절박했습니다. 주님께서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으신다면 나는 어떻게 하나 . . . 불안 속에서 쓸데없는 갖가지 상상들이
떠올라 더욱 괴롭게 하며, 그 낭비의 싸움으로 더욱 지치는 것 같았습니다.
포기할 수 없는 길, 저는 개척 때 나눈 하나님나라, 내면아이치유, 공감(sympathy)을 다시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내가 믿음 없음을 보았습니다. 내가 정해 놓은
현상에 사로잡혀 그 결과가 보이지 않는다고 나의 욕망과 불안에 붙들려 있는 나를
보았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십자가에서 주님 품안에 죽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제게 합당하며 복입니다(여호와 이레의 기도)를 수만 번 고백하고
드렸습니다.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주님께서는 다 예비하셨고 인도하고 계신데 내 생각에
사로잡혀 못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제국과 나사렛 예수를 여셨고, 코스모스와 영성,
세계와 의식, 임재기도, 약속 등의 계시가 연달아 열렸습니다. 다 목회 1기 때 심어 주신
것인데 이제 터져 나오면 선명해지니까 성도님들이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단계의 마지막 계시가 묵시 즉, 요한계시록이었습니다. 열어주시는 성령님께 저 자신이
스스로 놀라워 할 정도로 선명하게 하나님의 경륜과 생명의 비밀이 열려졌습니다. 영적
에너지 레벨이 한 단계 더 자라난 것을 이제 모두가 느끼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예배의 회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설교가 있을 수 있습니까? 아버지
앞에 자녀들이 모였는데 한 사람이 아버지는 뒤로 하고 자녀들에게 아버지를
가르치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래서 신약성경의 예배 어디에서도 설교가 나오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스데반과 바울의 메시지는 전도의 선포였지 성도들의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신약성경의 예배는 찬양과 기도였고 그 예배에서 피어난 삶 자체였습니다.
지난 주간 하나임교회는 위대한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새벽과 삼일예배에서
사도공동체의 예배를 향한 첫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저는 매새벽과 수요일에는
7:30분부터 10시까지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성도님들 스스로 모여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며 각자와 또 함께로 임재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 가를 보지
못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생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체성입니다. 내 삶에서 내가 나의
진실함과 원함을 따라 산다는 존재감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는 체험이 되지 않습니다.
세상은 나 자신보다는 시스템의 나만을 강요하니까요.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나의 진실함과 원함을 따라 온전히 할 수 있는 것이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신(I am)이 되어 하나님의 예비하신 경륜을 누림으로
그의 뜻을 이루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에 설교자가 생겼습니다. 이 설교자는 예배 인도자가 되고 결국 하나님의
대리자까지 되었습니다. 성도님들의 생명 주체성은 이제 예배에서도 찾을 수가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설교자가 아니면 아버지를 알 수도, 아버지의 뜻도 모르는 이상한
자녀가 되어 유업을 누리지 못하게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그것이 훨씬 더 편합니다.
아버지의 뜻과 나라를 구하는 것은 전문 성직자에게 맡기고 나는 나의 생존이나
씨름하는 것이 더 편해 보입니다. 이제, 광야의 길은 감추어져 버렸고 생존의 편함이
하나님의 복으로 둔갑까지 했습니다. 성도들까지도 진정한 의미와 가치의 창조보다는
편한 삶이 목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믿는 이유가 더 편한 집, 차, 환경, 조건과 삶이
되었습니다. 교회, 예배, 신앙, 생명의 의미와 가치는 전락되고 실제로 모두의 중심에는
불신(unbelief)이 자리했습니다.
아름답지 않습니다! 자랑스럽지 않습니다, 지금 이 기독교의 모습이! 복음과 진리를 담고
있는 기독교가 그 본질을 상실한 채 방황하고 있습니다.
허락하신 계시의 인도로 각자가 자신으로 또 서로 안에서 자신으로 하나님께 나아감으로
자신의 유업자됨(I am who I am)을 회복하는 것은 복음의 핵심이고 오직 십자가에서만
가능합니다. 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새벽기도와 삼일예배로 나아오십시오, 출석이
아니라 자신을 회복하러. 이제껏 나를 속인 강박, 의존, 완벽, 비하, 불안, 수치를 십자가
아래에 묻으러 오십시오. 그리고 코이노니아를 회복할 사랑방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2월 4일 D-day입니다. 주 안에서 하나임성도님들이 자랑스럽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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