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좋은 선물, 우리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임교회를 개척하며 예배장소를
빌리러 뉴저지 중부지역을 다니던 3개월이 떠오릅니다. 하도 힘이 들어서 창립 10주년
예배는 자체 교회당에서 드리게 해주실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남의 주차장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며 생각하던 것이 갑자기 새삼스럽습니다.
늘 주님의 은혜는 내 생각을 앞질러 갑니다. 이제 제약 없이 모이고 예배하고 훈련할 수
있다는 것이 아직은 낯섭니다. 오늘 우리 교회당에서 첫 예배를 드리며 이 자리에서 함께
나아가야 될 길을 바라봅니다.
한마디로 초월입니다. 예수는 역사와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사시면서도 역사와
세상의 한계에 사로잡힌 삶이 아니라, 초월하여 역사와 세상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의 상황과 한계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내가 그것을 초월하여 가치를
창조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종교행위를 포함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종교행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종교행위는 생명의 좋은 그릇이 될
수도 있고, 생명의 거짓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류역사와 성경이 보여주는 종교는 대부분
후자였습니다.
초월이라는 말은 추상적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삶은 육체, 정신, 영적으로 한계
투성이입니다. 그러나 그 한계가 나를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한계의 도전 때문에 그
한계를 넘어나를 피어내는 것입니다. 즉, 핑계될 수 있는 상황에서 핑계를 붙들지 않고
핑계의 자리에 나로써 도전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서 그렇게 할 필요는 없겠지요. 내가
살고 싶은 삶에 관해서는 어떤 핑계도 이유도 사정도 내 삶을 대체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올해 60이 되는 제게는 가장 간절한 것이 주님과 깊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욕심도
부려봤고, 야망도 품어봤고, 열심도 내었고, 그러한 과정들을 지나보니 이제나가 깊어지고,
순수해지고, 순전해져서 생명 자체에 가까워지고 싶습니다. 뱃속에서부터 배우고 덧입었던
생존의 허한 욕망에서 가능하면 더 자유해지고 싶습니다. 목회자로서가 아닙니다. 한
인간으로서의 소망입니다. 점점 기도도, 묵상도 일과 상황보다나의 순수로 흐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어떠한 핑계도, 이유도, 사정에도 내 자리, 내 길을 양보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양보할 시간의 여유도 더 이상 없습니다.
그것이 초월입니다. 초월의 결과는 주님께 맡겨드리고, 우리는 계속 작은 초월을 하는
것입니다. 육체가 피곤하고, 시간의 여유가 없고, TV와 computer 앞에서 잠시 생각을
내려놓고 등의 작은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내 성향, 방식, 기대에
맞지 않는 이웃들을 반사적(re-action)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영적 무저갱과 싸우셔야
합니다.
부부 간에도 정직하게 나누지 않고 속으로 하는 부정적 생각, 자기에고(ego)에 사로잡힌
갈등들을 즉시 즉시 십자가 아래에 내려놓는 작은 초월들 없이 진정한 초월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물 붓듯이 은혜를 주신 20세기 후반 동안에 한국사회는 중병이 들었습니다.
OECD 국가 중 초중고생 자살률이 1위입니다. 100명 중에 15명이 자살을 심각하고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초등학생 심리상담이 지난 10년 동안 2.6배 증가했습니다.
사회 전체로도 5명 중 2명이 우울증을 앓는 불가능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한국 뉴스에는
자살소식이 이제는 빠지지 않는 단골메뉴라 합니다. 매년 고등학생 10만명이 학교를
떠나고 있습니다. 이 한 명, 한 명은 곧 사회가 떠안아야 될 엄청난 부담이 될 것입니다.
얼마나 생산적 창조적 가능성을 사회와 교육 구조로 말미암아 파괴적 소모적으로 전환시킨
것입니까.
1970년대에서 2010년대까지 한국교회에 인구의 4분의 1과 천문학적 예산을 주셨습니다.
한국역사를 몇 번이라도 새롭게 할 수 있는 기회와 자원을 주셨는데, 우리가 세운 것은
종교적 우상 밖에는 없습니다. 거대한 기독교 세력, 기독교 지도자들의 부패와 추행들,
교회와 목회의 횡포 등은 역사 속에 분명히 보이는 데, 성결함, 긍휼과 자비, 물질보다 인격과
생명 중심의 가치관들은 너무도 희미합니다. 그 속에 우리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길은 확실합니다. 회개입니다. 진리보다는 세력, 함께보다는 나 중심, 성결보다는 정욕,
영성보다는 물질과 탐욕을 더 바랐던 우리의 길을 이제 돌이켜야 합니다. 또다시 주님의
은혜를 폐하여서는 안됩니다.
죽음의 순간에 스러지는 것들을 위해 더 이상 우리의 생명을 드리지 마십시다. 힘들고
손해가 되어도 생명을 가꾸십시다. 영원을 기억하십시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말씀으로만
가능합니다.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만나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인격입니다.
남의 소개만 받아서는(설교) 이해는 하지만 만날 수는 없습니다. 만남에도 안내와 소개를
필요합니다. 사실은 설교가 그것인데, 기독교가 종교 세력화되면서 설교는 인간능력의
각축장이 되고 사람들을 많이 모으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다보니, 하나님의 인격은
사라지고 인간의 천박함을 벗어나지 못하여 교회 안에서조차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를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말합니다.
말씀을 만나야 합니다.
지금 진행되는 언약의 순례는 그것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말씀 자체를
만나고 있습니다. 구하는 심령으로 참여하시면 삶의 새 지경이 반드시 열립니다. 새교회당에
들어오는 시간에 맞추어 언약의 순례를 출발시키신 주님의 역사에 저는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직접 만나지 않고는 초월은 없습니다. 새교회당에서 우리가 할 것은 단
하나입니다. 육체로 사는 우리가 이제 작은 초월을 가꾸어야 합니다. 그것 없이는 예배도,
교육도, 훈련도, 우리 세력 확장의 도구로 전락되기 싶습니다. 그리고 그 초월은 오직 말씀을
만남으로만 일어납니다.
하나임교회를 자랑스러워하는 이학권 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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