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하게 나눕니다 : 구원과 그 여정
기독교인들은 구원받았는가? 질문을 해봅니다. 질문 자체가 불경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시절이 하도 수상하여 질문을 던져서 생각을 열어보고자 합니다. 물론 누가 대답할 수
있는 것도, 대답이 또 대답 될 수도 없지만 생각의 정리에는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먼저, 구원은 생명입니다. 어떤 조건이나 자유나 자격이 아니고 생명입니다. 생명은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고 능력입니다. 장미는 장미로 아름답고, 사슴은 사슴으로
신비합니다. 장미나 사슴이 노력해서 더 아름다워지거나 더 향상되지 않습니다. 구원
받아 하나님과 연합한 생명은 생명의 최고의 질(quality)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는
8복의 질,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돌려대는 질, 원수를 사랑하는 질, 은밀하게 하늘의
아버지와 교통하는 질, 이 땅의 아픔과 거짓의 정화를 위하여 기도(주님의 기도) 하는
질, 모든 영광으로 작은 섬김을 기쁨으로 하는 질, 진리로 기꺼이 핍박받는 질, 모든 것
속에서 불변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신뢰하는 질의 생명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십니다 (마 5:48).
둘째, 생명은 성취가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알거나 하거나가 선제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그냥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거듭나라(요 3:3) 하십니다. 나는 것이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면 우리쪽의 문제는 죽는 것입니다. 거듭남이니 육이 죽어야
영으로 거듭납니다(요 3:5-8). 그러나 죽음도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닙니다. 죽고 싶어도
죽어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여기에 열쇠가 들어있습니다.
셋째, 육의 죽음입니다. 육의 생명, 세상 속에서 현상으로 사는 생명이 거짓생명 즉,
생존뿐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거짓에 대하여 죽지 않고는 진실이 살아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 거짓의 생명이 나 전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거짓 중에서 태어났고,
거짓생명으로 잉태되었습니다. 그 나는 거짓 세상에 들어와 거짓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정말 나는 누구일까 하는 질문을 가장 당혹스러워합니다. 육,
즉거짓의 나가 죽으면 나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내 평생을 통해 지키고 가꾸어 온
것입니다. 인간의 전체입니다. 심지어 자살은 가능할 수 있어도, 육의 생명이 스스로 죽을
수는 없습니다.
사실 죽을 수 없어서 또는 죽기가 싫어서 우리가 대체한 것이 종교일 것입니다. 종교는
온 인류가 거의 다 좋아합니다. 그러나 종교에서 초월적 생명(가장 높은 질의 생명 :
순수, 거룩, 희생)을 만나기는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역사 속에 살았던 대부분의
높은 질의 생명(하나님의 생명)은 종교라는 그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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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문 경우고, 대부분의 종교는 우리 속의 불안, 수치, 죄와 악과 정욕을 가리기에
급급했었습니다. 또 하나의척이었습니다.
넷째,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육의 생명은 스스로 죽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외부에도 너의
영광을 높이면 모든 문제가 없어질 거야 또는 하나님 같이 될거야 라는 거짓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육이 스스로 죽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육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만날 때에 일어나는(happen) 열매입니다. 거짓은 진실을 만나면 그냥
스러집니다. 어둠은 빛이 임하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은 어디서
만납니까? 두말 할 것도 없이 십자가입니다. 이것을 강조한 성경이 요한복음 특히
13장에서 20장까지입니다. 요한복음은 시작(1:14)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라고 소개합니다. 육신이 되어 오셔서 세상 죄를
지시는 하나님의 속죄양(1:29)을 통해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을 예고하며,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할 것(1:51)이라고 소개를 마감한 뒤에 13장에서
십자가 이야기가 시작될 때에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셨고,
하나님이 그에게 영광을 주신다고(13:31-32)라고 시작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영광이고, 그 영광이 가장 선명하게 나타난 계시와 현현의 자리입니다.
거짓과 죄악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출 33:18-23). 반드시
죽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현현 앞에서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고
뼈가 썩어 온 몸이 떨렸다(합 3:16)고 고백합니다. 욥은 하나님의 현현 앞에서
그 순간까지(42:5까지) 자신의 의를 주장하던 욥이 스스로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합니다(욥 42:6). 육의 생명이 스러진 것입니다. 그 의가 어둠으로 변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영의 생명, 초월적인 전혀 새로운 삶이 피어납니다.
요한복음은 그 마지막에서 부활과 사도들의 전환(20:1-21:25)을 증거하기 직전에 이미
십자가의 영광을 만난 전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아리마대 사람 요셉입니다. 그는
예수의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 두려워 숨기던 사람(19:38)이였으나 십자가를
마나고 자신이 제자임을 담대히 나타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
하면 역적과 거짓 메시야로 처형됨 앞에서 오히려 부정하고 숨겨야만 됩니다, 십자가
직전의 제자들처럼. 십자가는 분명히 전환의 기폭제였습니다. 또 한 사람 니고데모도
이 전환을 보여줍니다. 산헤드린 의원의 신분 때문에 밤에 예수를 찾았던(19:39) 그가
공공연히 예수를 공경함을 나타냅니다. 옛 삶이 죽지 않았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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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하나님의 영광, 즉 십자가를 만나면 반드시 육의 생명이 죽고 영의 생명(새 생명)
으로 거듭납니다. 거듭남 자체가 죽고 다시 태어났다는 말이니까요. 그렇다면 죽지 않은
거듭남은 가짜입니다. 육의 생명이 죽지 않았다면 bor-again life가 아니고 새 삶을 사는
척하는 double life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간단합니다. 십자가를 만난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교리를
만난 것입니다. 십자가는 영광이지만, 십자가에 대한 사람의 설명은 영광이 아닙니다.
좋은 안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를 만나지 않고도 만난 척하는 거짓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교리는 양면에 날을 가진 것입니다. 쓰는 사람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독도
약도 될 수 있습니다. 저는 항상 제 설명을 잘 이해하는 것으로 성도님들께서 자신도
아는 것으로 생각할까봐 두렵습니다. 항상 얘기 드리지만 제 설교는 손가락입니다.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손가락을 보지 마시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진리를 보셔야
합니다.
여섯째, 육의 죽음 없이는 높은 질의 생명은 불가능합니다. 육으로 최고의 몸부림은
어거스틴의 고백록이나, 토마스 머튼의 칠층산이나, 마틴 루터의 로마서 강해 등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가장 선명히 볼 수 있는 곳이 사도바울의 로마서 7장입니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 . .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 . .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 . . 내 속에 거하는 것이 죄니라 . . .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14-24 정리)
육의 죽음 없이 생명의 삶을 추구하면 반드시 만나는 것이 절망입니다. 그래도 추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절망이 죽음입니다. 육의 생명의 절망을 만나지 못하면 끝까지
미련을 두고, 작정하고는 포기하고 은혜 받고 그 삶으로 돌아가고, 두려우면 다시
피해버리고, 결국은 해봐도 안 된다는 불신에 빠지게 됩니다.
복음의 진리는 온 세상에 주어졌지만, 아무에게나 보이지 않습니다. 찾는 자에게
보입니다. 누가 찾습니까? 절망을 만난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에서 지극히 값진 진주의 보화를 말씀하셨습니다. 또 거룩한 것을 개에게,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이어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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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 거듭난 생명은 자유를 누립니다(요 8:32, 갈 5:1) 육에서 오는 불안, 수치, 강박,
욕망에서 반드시 자유를 누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 안에 있는 동안 완전한
자유는 아닙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을 보십시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육)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영)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 3:13-14)
그러나 이 육체 안에서 시작된 자유는 아주 중요합니다. 이 자유의 능력이 육체를 벗은
후에 하나님과 그 모든 유업을 누리고 피어나게 하는 권세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 자유로 말미암아 육체를 벗은 후에 하나님과 그의 세계의 모든 신비와 아름다움을
피어나게 하며 나의 기쁨과 유업으로 누리게 하는 생명의 비밀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과정은 육체를 벗을 때까지 마귀의 거짓과 유혹이 시시때때로 틈타고
있습니다. 이 나눔이 나의 여정을 돌아보고 시험을 넘어 영광을 향한 믿음의 순례에 좋은
안내가 되기를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목회 2기에 우리가 교회되는 소망 가운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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