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관점에 의해 결정됩니다. 관점(perspective)은 무슨 거창한 얘기가 아니고 나
자신에서 지금 자유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특징은 어쩔 수 없이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내가 자라나고 살아오고 경험한 입장에서만
보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한국 사람으로 자라고 살아온 사람은 한국적이고
한국적 관점에서만 보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관점은 아주 제한적입니다. 그것만 인식하면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자신의 관점이
아주 아주 아주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하나님 같이모든 것을 안다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기도와 묵상은 오묘한 계시를 받는 것도 아니며, 받으실 필요도 없습니다. 성경은 정말
완전하고 온전한 계시이니, 성경만 정직하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나의 관점 밖의 관점을 본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연륜이 쌓이면 인류와 역사가 보이고, 비로소 예수님이 누구시며
왜 오셨는지가 보입니다. 보이는 만큼 근심 걱정에서, 불안 어둠에서, 죄와 정욕에서
자유해집니다. 보는 것이 복입니다.
이 관점의 해방 중의 해방이 8복입니다. 울림 코이노니아를 마치신 후에도 계속
8복 묵상을 추천합니다. 반드시 삶이 복되어 지십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약속하신
복이니까요. 전체를 간단히 정리해 보십시다.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여기의 복(happiness)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happen(발생하다)이다. 따라서 아,
복되어라! 다음에 나오는 것이 복을 피어나게 한다는 뜻이다. 여기의 가난은 히브리어로
에비온(ebiyon)으로 기댈 곳이 없다의 뜻으로 구약에서는 과부, 고아, 이민자들에게
사용된 말이다. 즉, 세상의 어떤 것도 기댈 것으로 여기지 않는 마음이 복된 것이다.
세상의 것에 기대면 반드시 종노릇하게 되고 평생 불안에 사로잡힌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시오, 의지할 바위시오, 지키시는 산성임을 고백할 수 있는
심령보다 복된 심령이 있는지?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은 펜툰테스(penthountes)라는 단어로 상실의 슬픔이고, 누가복음은
클라이온테스(klaiontes)로 땅을 치는 절망적 애통함을 뜻한다. 이 두 단어는 히브리어
사파드(sapad)로써 마태는 내적 슬픔을, 누가는 외적 애통을 강조한 것이다. 제국의
삶에서 애통하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나라를 갈망하고 기다리게 된다. 그래서 지금
웃는 자들이 화있고(눅 6:25) 애통하는 자들은 반드시 위로를 받되 그것은 영원한
위로이다.
문제는 애통함이 아니다. 애통해야 될 삶을 애통 없이I'm fine에 급급하고 유한한 육체를
살면서 진정 하나님을 믿지도, 기대하지도 않는 것이 진정 문제이다.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는 히브리어로 아나브(anab)이다. 이것은 나의 자유를 상대 존중을 위해 사용하는
아비와 어미의 마음을 뜻한다. 자식을 위해 희생을 기뻐하는 아직 인간에게 남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놀랍게도 이 희생에서 인간은 존재의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누리게
된다. 나는 확신한다, 겟세마네의 주님은 힘드셨지만 행복하셨음을!
누가 땅을 차지할 것인가? 나폴레옹이 아니다. 이 땅의 엄마들이다. 눈을 열어 잘 보라,
특히 남성들이여.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의의 히브리어는 쩨다카(tzedaka)이다. 어떤 기준에 부합되거나 조화된다는 뜻이다.
인간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사람은 종신토록 땀 흘려 수고하고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거두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기준이 되면, 마음이 가난해지고, 애통하고, 온유해져서
하늘의 만족으로 배부르게 된다.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은 히브리어로 케세드(chesed)로 자비의 뜻이다. 자비는 함께 공감(empathy)하는
것이다. 마음을 직통하는 감동의 열쇠이다. 마음을 얻는 지름길이다. 사람은 자기를
느껴주는 사람과 함께 느끼게 되어 있다. 마음을 얻으려면 공감하라. 남편, 아내, 자녀,
이웃을 교정하려 말고 공감하라. 그러면 그들이 나 자신을 긍휼히 여길 것이다. 즉, 나의
마음과 뜻을 존중하여 나의 길에 함께 해 줄 것이다.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청결의 헬라어는 카타로스(katharos)이다. 잡티 없이 순수함을 의미한다. 가장 쉬운 예가
어린아이의 마음이다. 성인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다. 그 동안 몸에 밴 계산을 내려놓는
것이니 불가능하다.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7절까지를 지나온 마음으로 마음 내려놓기의
무수 무수 무수한 훈련을 지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이 느끼고 보이기 시작한다.
마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은 헬라어로는 에이레네(eirene)이고, 히브리어로는 샬롬(shalom)이다. 샬롬은
자리의 문제이다.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의 핵심은자리이다. 그 결론은 인간의 자리는
하나님 안, 즉 그리스도 안(in Christ)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누리고 하나님으로 피어나는 것은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디에 있느냐에 달린 것이다. 제국 안에 사는 사람은 자녀의 권세도 유업도 누릴 수
없다. 오직 하나님 안에 거할 때에 누리는 생명의 영광이다. 높은 존재 수준이다.
마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박해하였느니라
이상 3절에서 9절까지는 사는 사람은 제국의 존재방식에 완전히 대치되는 사람으로서
핍박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때에는 이미 환경에 re-act가 아니라 자신(I am)을 사는
권세와 능력이 충만함으로 그 핍박은 그 사람의 존재가치와 의미를 확대시켜준다. 간디,
김구, 링컨, 마틴루터 킹 목사, 만델라에게서 보듯이, 영원한 영광, 영원한 가치가 되는
하늘의 상이 크고 넘치게 된다.
그러나 복음을 종교화시켜서 부담도, 도전도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 이기(ego)
를 위한 기복신앙으로 전락까지 시켜버린 시대에 어찌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날꼬,
한탄스럽습니다. 2014년은 문제해결하다 끝나서는 안 됩니다. 앞날을 내다보며 우리
축복의 뿌리를 가꾸는 신실한 한 해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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