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유산 : 감동
할머니가 옷가게에서 일하며 버는 돈은 한 달에 150달러. 이 가운데 15달러는 십일조,
10달러는 주일헌금, 5달러는 세금으로 냈다. 자신의 생활비로 쓰는 돈은 고작 20달러.
나머지 100달러는 한국의 전쟁고아들을 위해 송금했다. 70년대 중반까지 거의 20년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경기도 하남고등학교를 설립한 송정윤 여사의 이야기이다.
송 여사가 보육원을 세운 곳은 경기도 망월동, 지금의 하남시다. 7000여 평의 땅을
마련해 교회와 고아원을 지었다. 30여 명의 고아들에게 배움과 쉼터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살림은 캘리포니아의 가나안 재단에서 보내주는 400달러와 옷가게
할머니의 100달러 등 미국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꾸렸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5년째 되던
해인 1958년이다.
송 여사의 고향은 경북 청도. 그의 나이 18세 때사진신부로 하와이 땅을 밟았다. 이곳서
사탕수수밭 이민 2세인 송진구와 혼례를 치렀다. 그가 다시 고향을 찾은 건 둘째 아들의
갑작스런 사망이 계기가 됐다. 40년 만에, 그것도 환갑을 넘긴 나이였다. 심란한 마음을
추스르려 온 땅에서 그녀의 눈에 거리에 넘쳐나는 전쟁고아들이 자꾸 눈에 밟혔다.
자신의 가진 전부를 정리해 황량한 벌판에 부지를 사서 고아원을 지어 그저 죽지 않게
돌보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먹이고, 입히고, 의식 있는 교육을 시키고, 뜻 있는
교사들을 초빙하여 가르쳤다. 이것이 하남고등학교의 전신이 된 것이다.
송 여사의 아들이 바로 알프레드 송(한국명 송호윤)이다.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공군에
입대해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중위로 전역한 그는 USC 로스쿨에 진학해 변호사의 길을
걷는다. 몬트레이파크 시의원으로 정치에 첫 발을 내디딘 그는 1962년 아시아계 최초로
캘리포니아주 하원의원에 당선돼기적의 황색돌풍을 일으켰다.
5년 후 알프레드 송은 한국 시찰단의 일원으로 처음어머니의 나라를 찾았다.
고려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는 등 극진한 환대를 받았으나 실제 목적은 어머니와 함께
귀국하기 위해셔였다. 아들의 간곡한 권유에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이승에서의 내 소명은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다. 내 뼈를 이곳에 묻겠다.송 여사는
고아들과의 약속을 지켜냈다. 지난 1990년 93세를 일기로 작고한 그는 자신의 땀과
열정이 배어있는 캠퍼스에 묻혔다. 묘지 옆에는고아 아들들이 돈을 모아 동상을 세워
어머니의 헌신을 기렸다.
알프레드 송은 4선 상원의원을 지냈다. 16년의 오랜 재임기간 동안 모두 176개의 법안을
상정해 통과시켰다. 특히 그가 만든캘리포니아 증거법(AB333)은 지금도 변호사들
사이에형사법의 바이블로 불릴 만큼 유명하다.
아시아계 정계진출에 선구자 역할을 했던 그는 2004년 10월 오렌지카운티 어바인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그의 탄생 94년을 맞아 작년에 LA 한인지역 중심의 지하철역이
알프레드 호윤송 역으로 명명되었다. 마이크 혼다 의원이 앞장서 이룬 일이다. 아름다운
이야기는 감동으로 흐른다. 우리가 우리 자녀와 다음 세대에 줄 수 있는 가장 복된
유산은감동의 삶이다. 생존의 편안에 속지 말고 감동으로 흐릅시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먹고 살다만 가기에는 너무나 아름답고 귀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지 않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