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이 허혈의 동함이 그칠꼬
노동절 휴일 저녁에 꽤 오래 알았던 목사님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평소 거의 연락이 없었기에 좀 의아했지만 내용을 읽으면서 오는 주일말씀 을 묵상하던 제게 본문과 편지내용이 동의보감의 구절 '허혈이 동하면' 과 겹치면서 스가랴 14장을 지난 주 말씀에서 어떻게 나아가게 할 것인지가 '확' 열리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편지를 보내신 목사님은 같은 교단이여서, 회의나 모임 때 만나는 분이셨 습니다. 제게는 늘 낯선 분이셨습니다. 회의나 모임에 발언을 다른 분의 2-3배하시고(참고는 저는 95% 이상발언이 없습니다 : 제게는 행사에 관해 무엇을 하자 어떻게 하자는 늘 본질과 상관없는 일로 느껴집니다). 신학교에 계시며 한국과 미국을 특별히 큰 교회들의 환대를 받으시면서 두루 다니시는 분입니다. (제가 목사님들께 욕(?) 먹는 이유가 자기목회 밖에 모른다는 것입니다).그것이 사실이기에 저는 변명한 적도 없는 데 질문은 늘 있습니다. 목회에 제 모든 시간을 쏟아 부어도 늘 시간이 모자라 어렵습니다.예로 손발톱이나 머리 깎는 시간을 못 내기가 일쑤인데, 어떻 게 그 많은 모임, 심지어 골프까지 시간을 내시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그분은 대외적인 이미지는 대단하셨는데 제게는 늘 무언가 허하고, 외롭고, 초조하게느껴지는 분이셨습니다.
보내신 글을 읽으며 만감이 교차되었습니다. 물론 그분과 제 삶과 목회, 이 땅의 삶, 수 많은 허상들, 무엇보다도 이 시대의 목회와 지금 이 글을 쓰시 는 심정과 삶이 아프게 참으로 아프게 느껴졌습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아직 내 안에 남아 나의 허혈을 동하게 하는 내 욕망과 불안을 만나는 시간 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의 글을 옮깁니다.
"먼저, 가장 크게 범한 죄악을 참회합니다! 종교적인 성공과 출세를 꿈꾸며,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온 저의 죄악입니다. 예수를 잘 믿으며 교회 생활을 잘하고, 공부 많이 하면, 성공하고 출세하는 줄 알았습니다. 학교 교수가 되거나, 큰 교회 목사가 되어, 무수한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한 몸에 받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의 표상이기에, 그것이 제가 이루어야 할 목표라 생각했습니다. 그게 인간의 본능이기도 하지만, 제 눈에 비쳐진 오 늘날 교회와 지도자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그 성공과 출세는 분명 하나님 의 축복이라고 하는데 -, 그런데, 그 길을 좇아가던 저에겐 왜 가슴 벅찬 주님사랑과 삶의 의미와 보람이 넘치지 않습니까?! 올라가면 갈수록, 왜 마음의 공허함이 심해지고, 잘 먹고 잘 사는데, 왜 경건의 모습이 줄어 드나 요? 어디서부터, 도대체 그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 그러다, 나이 가 들고, 시련과 함께 온 기도와 말씀묵상의 오랜 시간들 가운데 깨닫게 된 것은, 그게 주님이 보여주신 길이 아니며, 제가 걸어야 하는 길이 아니었 다는 것입니다.
여태껏 보지 못한, 주님의 눈물의 가르침이 새롭게 보이면서, 나의 무지몽 매 한 죄악들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복음의 일반적인 해석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정한 의미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점점 더해집니다. 처소 하나 갖지 못한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찬란한 예배당과 고급 목양실을 짓 느라 애를 쓴다는 것이 -, 책 한권, 글 한줄 남기지 않으신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내 이름 붙은 책 하나 만드느라 뛰어다닌다는 것이-, 가난하고 병든 죄인들을 찾아다닌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부자와 권세 있는 강한자들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 -, 낮은 사람을 사랑하며 섬기신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대 접받고 명예, 영광 얻으러 분주히 다닌다는 것이-, 비싼 옷 입고, 커다란 고 급차 타고, 높은 권세를 나타내며 다니는 목사님들의 모습이 -,"
물론 기독교의 허상은 이제 말할 필요도 없이 모두가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제가 처절하도록 아팠던 것은 첫째로 내 자신과 이 시대에 대하여 알면서도 당 연한 것으로 눌러 치부해 모르는 사이에 타협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둘째로 의식으로는 그러한 신앙에 대하여 비판하고 일깨우면서도 무의식적으 로는 그러한 종교의 편함에 안주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나만 은 다르다, 나는 허상과 부조리를 비판하는 사람이라는 정당화에 안주한 체, 나를 보호했기 때문입니다. 목회에서 너무 아픈 진실을 이야기하면 성도들이 감당할 수 없고 지나친 부담에 눌리게 돼 등의 정당화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 가서 저의 기독교에 대한 좀 혁신적(radical) 입장을 싫어하여 온갖 시비를 만드는 분들로부터 피하고 싶었던 것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언제 이 허혈의 망동이 그치고, 보혈(참생명)로 살아갈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언제 나는 진실로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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