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 계시와 누림
우리는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각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만 지각한다. 즉, 지각할 수 있도록 훈련된 것만 지각할 수 있다. 한 생리학 실험에서 갓
태어난 고양이들을 수평무늬로 내벽을 장식한 작은 방안에 집어넣었다. 뇌의 형성이 끝나는
시기가 지난 뒤에, 고양이들을 그 방에서 꺼내어 이번에는 수직선으로 내벽을 장식한 방안에
넣어 보았다. 수직으로 그어 놓은 그 선들은 먹이를 감춰 놓은 장소나 출구가 있는 곳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수평무늬의 방에서 자란 그 고양이들은 단 한 마리도 먹이를
먹거나 밖으로 빠져 나오지 못했다. 그들이 자란 환경 때문에 그들의 지각이 수평적인 요소에
제한되어 버림으로 수직요소는 인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각에도 그런 제한이 있다. 우리는 어떤 현상이나 사건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익숙해진 방식으로만 사물을 지각하도록 조건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훈련된 방식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극히 제한적이다. 그래서 우리의 지식은 바닷가의 조개껍질 안의 모래보다
적은 것이다 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두 가지의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는 실체를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식한 것은
우리의 인식과 인간법칙 속의 현상일 뿐,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세계에 대하여는 무엇을
모르는지 조차도 알 수 없다. 그래서계시가 필요하다. 현상적 제한이 없는
본질세계로부터의 계시 없이는 우리는 결국은 허무하게 스러지는 세계에 제한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번째는 누림이다. 무엇을 누린다는 것은 그 존재를 그대로 체험하는 것이다. 통전적
체험이다. 커피를 마시면 커피의 쓴맛, 고소한맛, 단맛, 신맛 등 전체를 맛보는 것이다.
단맛만 빼서는 커피를 누린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 존재는임재안에 있어야 한다. 현상인
우리는 인식도 체험도 극히 부분적이다. 누림이 없다. 종신토록 땀흘려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거둘 뿐이다. 그런 우리가 내 존재자체로 만물을 존재 그대로 만나고 누리는 것은 만유의
만유이신 주님의 임재 안에서만 가능하다. 임재는 먼저 나를 존재자체로 회복되게 하시며, 그
존재로 만물자체를 누릴 뿐 아니라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누리는 신비를 열어준다.
예배는 계시가 임하여 누림을 회복시키는 하나님 임재 안의 존재회복이다. 존재의 주체성의
회복이다. 은과 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